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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질수록

나에게서 그들의 흔적은 사라진다 오래전 역사
속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존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누구든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자신 혹은
특정 대상에 대한 과신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통해 나오지 않았다면 어떠한 곳에서든 자기자신을 찾겄지 그런ㅇ데 왜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전부인양 혹은 주제넘게 모두 그들자신같은 것으로은근히 물들이려하는가?


집단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집단을 먹칠하면서 그 자신들 개인은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면
오산이다 그 오물진창을 진정 빠져나갈수 있는 집단에 속한 개인이 있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존중해주는 자뿐이다 물론 집단=개인은 반드시 백퍼성립되는건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을 모독하거나 모욕할 권리나 자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난 집단의 개성보다 개인의 개성을 추구하며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제넘게 개인은 집단을 모독하거나 모욕할 권리나 자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무의식적 한계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그들이든 나든 세상에 빛을 본건 자연의 조물주 덕분이지 특정 인간 그것도 흐려져간 뿌리를 둔 인간무리가 아니다. 물론 오래된 뿌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오래되든 새롭든 의미가 남용된 뿌리는 아무것도 아닌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의미를 피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모순인 것이다 모종의 가치를 부여했다면 의미를 피해갈 수 없고 반대로 모종의 의미를 부여했다면 가치를 피해갈 수 없다

그들은 특별히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쁜 사람 코스프레를 를 하려하나? 그러지 않아도 아니 그러지 않아야 좋은 사람 아닌가? 모르겄다 아니 알수도 있을 지 모른다 알려고 노력한다면 모른는것이 무효될 것이다 자신의 한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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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일단 이것을 가렸을 때’라는 조건부터 내걸었냐 하면 이걸 앞으로 자세히 알아볼 자격이 있는지 혹은 온전히 인정해줄 자격이 있는 지를 가리기 위함이다. 즉,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 사전에 알아보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엇이 합당한지 선택 당하는 대상만 자격여부를 가리라는 법 있나? 선택 당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선택하는 자도 자신의 주제에 맞는 선택권을 가졌는지 아닌 지와 같은 주제파악이라도 보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주제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거라면 혹은 세속적으로 대체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마치 그 자신이 이에 대한 선택권이라고 가진 양 군다면, 걸맞은 선택권을 가진 자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박쥐 같은 안일한 기회주의자의 월권에 불과할 것이다

못한다=안 한다 라는 등식은 때론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런 경우는 자기가 자신에 대한가치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오직 스스로에 대해서만 국한 될 뿐이지, 상호관계에 있어서까지 통용될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타인의 가치관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못한다와 안한다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건 오직 스스로에게만 그 자기자신만의 사정일뿐 그걸 타인에게 이해나 인정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나 권유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스스로에게 있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거나,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시점에선 그저 안 한다=못한다라는 등식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뭔가에 대해서 간절히 필요하지 않거나 필요하더라도 기준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 전에 그 대상이야 말로 그들을 그렇게 여긴다는 우회적인 반증일 뿐이다. 선택권에 없는 걸 있다고 여기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착시현상일 것이다.

내가 예전에도 언젠가 말한 적 있듯이 자신과 본질적으로 상관없는 존재를 깎아 내리려 하지 말고 격리 한 채, 그 자신들이 보기에 상대적으로 일찍 세속과 타협한 아름다운(?) 대상에 다가가서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끼리 한계에 머물면 되는 것이다. 은근히 책임 회피하려 하지 말고.

미안하다?


 스스로 정하는 가치와 상대가 정하는 가치의 차이는 무엇일까?
같은 부담감이라도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세속적 대상이 제시하거나 상정한 가치는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정작 그 대상과 가볍게 혹은 일시적으로 엮일 순 있다 여겨도 깊고 오래 엮이고 싶진 않거나, 설사 좀 깊게 엮이더라도 전적으로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경우…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거품에 대한 심적 부담이다. (상대적으로 거품이 과대 가치 상정된 객관성조차 무의식적으로 그 자신의 주관성과 일치함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것을 거품 대신에 애먼 알맹이에 대한 과대상정으로 뒤집어 씌우려는 우를 범한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으로 거품에 대한 책임감은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세속적이든 비세속적이든 대상이 스스로를 자부하고 상정하거나 알게 모르게 제시한 가치에 대하여 완전하게 수긍하지 못하기에 그대로 대가를 치를만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그들 보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 거품이 없는 알맹이이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과분함을 되려 알맹이에 대한 과대 상정된 가치 탓으로 전가하는 식으로 상대적으로 높게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해주고 싶지는 않은데 가볍던 깊던 주제넘게 뭔가 엮이고는 싶을 때 느끼는 부담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엮일 수 없는 존재와 억지로 엮어 보려고 비겁하게 애매모호하게 인정하려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책임권한의 범위는 전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후자에 대하여 언제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거기엔 함정이 있다. 그들은 그들 기준에서 상대의 빈틈이나 허점이라고 여기는 일부를 비합법적으로 저당 잡아 놓고선 존엄성에 대한 범접가치를 떨어뜨린 후에 그것을 빌미로 그들의 자격을 상회하거나 초월하는 상대의 다른 면들을 은근슬쩍 빈틈과 뭉뚱그려 인격을 거저 긁어 모으려는 허황된 꿍꿍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의식적으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 증명하기 위하지만, 그들은 그들자신의 한계 안에서 통용되는 최선을 위한 그들자신의 결정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리스크나 부담을 덜기 위해 그들만의 한계 안에서 최상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만의 한계를 모두의 한계로 혹은 반대 편을 포섭하는 한계의 범위로 부풀려서 둔갑시키는게 특징이다..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그 책임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간과한 채..

그들과 내가 이리저리 긁어모아 합해야 100퍼센트를 혹은 100센트를 향해간다고 여긴다면 상당히 주제넘는 발상인 것임..
근본적으로 섞일 수 없는 것끼리 섞으면 그 기준을 초과되는 동시에 도리어 미달된 것을 의미할 뿐,,
상향을 가장한 하향이랄까..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이란?


B를 인정하지 않는 A는 있을 수 있어도 A를 인정하지 않는 B는 있을 수 없다.
B가 A를 모욕할때 조차 B는 그 자신의 얼굴에 먹칠 하는 격이다 왜냐하면 B의 정체성의 일부는 A가 포함되어 있기에.

끝이 존재하지 않는 시작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어도 시작이 존재하지 않는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2를 인정하지 않는 1은 있을 수 있어도 1을 인정하지 않는 2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건 은연중 1을 포함하고 있는 2 자기자신에 대한 결여감일 뿐이다.
그럼 1이 2에 대해서 결여감 느낀다면? 적어도 자기자신에 대한 결여감은 아니다. 왜냐하면 1에는 2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집단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은 있을 수 있어도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존속할 수 없다.
집단이 없어도 개인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개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개인이 모여 존재할 집단도 없기에.

‘유’를 허점이라 여기고 합당히 공격하거나 비판할 수 있어도 ‘무’를 허점이라 여기고 합당히 비판하거나 공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가 존재하는 곳은 빈 곳이므로 비유하자면 날아오는 그들의 주먹을 피하는 상대를 놓치고 단단한 벽에 그들의 맨주먹을 날리는 꼴이며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만일 그 벽조차 상대의 존재를 뜻한다고 여기고 힘껏 치더라도 그건 벽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서 그들 자신을 과도하게 투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무’는 아무리 소유하더라도 소유자가 불분명하기에. 무엇보다 그들의 '유'는 주제넘게도 '무'의 소유자를 대변하거나 대리하려는 꿍꿍이를 은연중에 품기에 그들의 '유'는 공격받거나 비판받아야 할 일말의 제대로된 의미조차 없다..아무리 그들의 '유'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이 합당할지라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그들에겐 과분하다)


나는 나와 어느 한 구석이라도 조금이라도 닮은 자가 자아존중감이 부족하거나 어딘가 고질적인 열등감에 찌든 자라면 결코 동질감을 느낄 수 없고 존중해줄 수도 없을 정도로 감정이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방증이며 같잖은 무리들에 의해 조종당하거나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를 대리하거나 대변한다기 보다는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일부를 치졸한 반대편이 인질로 삼고 있으므로 오히려 나의 반대편을 대리하거나 대변하는 셈이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 대하여...


여자 아이스하키 팀 남북 공동 팀으로 참가하는 것 가지고 애써 반박 안 하겠다만..
그걸 가지고 남북평화라느니 이미지 향상되는 절호의 기회라느니 같잖은 미화 좀 하지 말았으면……

물론 난 남북통일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걸 밝혀둔다.
하지만 아직 남북통일도 되지 않고 북핵 문제로 시끄러운 상태에서 그렇게 미화하는 사람들 치고 대게는 남한 여자 아이스 하키팀이 세계 22위라는 걸 들먹이며 부족한 실력 탓하면서 이번 남북공동으로 참가하는 평창올림픽에서 부족한 점을 메워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거나 적어도 남북평화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길 수 있을 거라 주장하는데…

뭐.. 공동으로 하던 그냥 하던 대로 하던 어찌됐든 간에 좋은 결과 얻을 수 있으면 좋지…
거기다 대고 애써 안되다고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그들이 곳곳에서 남북 공동 참가 기회에 대한 긍정적 결과에 대한 가능성을 절하하는 사람들을 ‘하던 대로 하자는 식의 관성에 젖어있어 발전을 못한다’고 비하하거나 비판하면서
그들 자신이야 말로 지난 실적을 근거로 들어 남한 여자 아이스하키팀 선수들의 잠재력과 역량을 관성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예전 주변의 기억을 되살리자면, 학창시절 학원 다니거나 그룹과외 받으면서도 중하위권에 맴돌던 아이가 정신차리고 독학으로 해서 상위권에 들은 경우도 봤고, 반대로 상위권에 있던 아이가 중위권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곳인데..

이번 평창 올림픽에 남북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까지는 좋다.
다만 그걸 두고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느니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양 같잖은 선심 혹은 미화는 안 했으면 한다..

그냥 아무리 잠재력이나 가능성과 역량을 가졌어도 실적이 안되면 실력으로 쳐주지 않는 냉혹한 세상이니까 실적,실력 안 되는 것들은 변명 말고 떨어져서 알아서 돌파구를 마련하고 될만한 것들만 붙어서 안정장치를 마련하자고..
뭐 안되더라도 남북관계를 위한 얄팍한 이미지개선이라도 노린다고 그냥 솔직히 말해라.

어차피 스포츠 게임가지고 개인의 존엄성이나 정체성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집단을 위한 세속적인 수단이니까 설령 선수들이 상처를 받더라도 치유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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